보통 책을 읽을 때, 좋은 구절이 나오면 페이지만 적어놓고 포스팅 할 때 타이핑하는데, 이 책은 읽을 때마다 몰입하느라; 페이지 적을 생각을 못했다.
결국 숨 찬 감탄과 나의 짧은 평만 남았다.
이 책은 아주 영리한 구조를 가진 데다가, 충분히 긴장감을 자아낼 수 있을 만큼 스토리가 짜임새있고 훌륭하게 구성되어 있다.
순식간에 몰입되고, 레오가 긴박한 상황에 처할 때면 나도 모르게 잠시 숨을 들이키며 다리가 뻣뻣하게 굳는다.
또한 모든 영화의 원작이 그러하듯, 이 책에서는 더 잔혹하고 저열하게 그려진 세상을 면밀히, 그리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레오와 부모님과의 재회, 이반을 살해한 원인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 미하일의 딸들을 고아원에 보낸 경위, 레오가 맹목적인 애국주의자에서 좀 더 합리적인 인물로 변해가는 과정 등등.
또한 영화는 책에 비해 캐릭터도 상당히 압축이 되어있는데, 책에서의 라이사는 훨씬 강단있는 인물이고 단지 사이드킥이 아닌 중요한 역할이다. 또한 레오는 생각보다 우매하고 순응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요컨데 자신의 세상에 갇혀 눈과 귀를 닫아버린 인물이다. 그리고 바실리는 훨씬 더 비열하고 똑똑하며 야망있지만, 집착하지 않으면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할만큼 피해의식에 젖어있는 인물이다. 덕분에 레오와 바실리의 관계는 영화에서 보여진 것보다 훨씬 더 시소처럼 파도치듯 흔들거리며, 저울추를 이리저리 움직여 균형을 잡지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또한 이건 내 추측인데 아마 작가는 그(바실리)를 게이로 설정하지 않았을까. 레오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은 사랑과 닮아있지만, 그 당시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죄악이었고 또한 그 스스로도 동성애자라는 걸 눈치챌 수 없었을 테니, 자신도 모르는 사랑의 감정이 비뚤어진 채 발현되어 집착과 질투를 낳았을 거라 추측해본다. - 그리고 바실리가 레오보다 다섯 살이나 많다니; 영화에서는 톰 하디보다 조엘이 훨씬 어려보였는데... -
중반부까지는 영화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욕을 하는지 몰랐는데, 400페이지 무렵부터 갑자기 급변하기 시작하더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500페이지가 넘어가는 장편 소설을 두 시간 가량의 짧은 영화에 담으려니 압축이 필요한 건 당연하지만, 스토리의 토대가 되는 중요한 가닥을 다 삭제해버리다니.
레오의 과거와 안드레이와의 연결고리, 살해의 이유 같은 가장 본질적인 이야기들이 없으니, 인물을 대변하는 정당성과 개연성이 사라져버렸다.
물론, 영화를 볼 당시에는 그저 살인자의 심리란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말았는데, 이건 뭐. 완전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역시 원작이 있는 영화는,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봐야한다. 실망하기 싫어서든, 표현되지 않은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어서든, 어쨌든.
이 이야기는 레오가 마지막에 미하일의 두 딸을 입양하면서 끝이 나는데, 첫만남은 어찌되었건 본인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한 부모의 역할을 그대로 계승하는 오마주같은 삶을 살게 되면서 그에게 면죄부를, 어쩌면 반복되는 윤회의 인생과 축복을 주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여운을 남기는 거룩한 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