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죽음이 가슴 아픈 건 나와 연관된 우주가 하나씩 사라지기 때문이구나. 그렇다고 해서 추억을 만들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언제든지 슬픈 운명을 지니고 간다.


그리고 천천히 깨달아갔다. 단지 그의 얼굴과 손가락과 셔츠 깃을 보며 그에 대해 상상하는 것만이 내가 상대방에 대해 가장 많이 알 수 있는 순간이며, 속을 들여다볼수록 그를 캄캄하게 모르게 된다는 것을.


아무리 가족과 친구와 애인이 있어도 인생길 끝까지 사실은 뼛속까지 우리는 혼자인 거잖아. 젊을 땐 몰라. 그런데 나이 들면 정말로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가는 거야. 그때야말로 마음을 나눌 상대가 필요한 건데, 단지 곁에 있다는 온기만이라도 절실한 건데, 정말 철저하게 고독해지는 거야.


난감한 상황에 부딪힌 소설가와 그의 동반자. 말이 없는 동반자에게 소설가가 말한다. 이거 글로 쓰면 되겠네, 나의 글은 성공수기가 아니거든. 단지 어둠 속의 기록, 이 어둠이 없다면 난 쓸 수 없으니까, 말하자면 이 어둠은 남는 장사야.


한 권의 책을 쓰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실패하고 절망하고 잘못됨으로써 구원받는다. 애당초 완벽하고 집약적인 성공 수기를 쓰려는 결심만 버린다면, 당신의 실패가 당신의 책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쓴다는 건 남는 장사다, 확실히.


때로는 상대를 전혀 바라보지 않고 있어도 상대의 마음이 읽히는 경우가 있다. 그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나 역시 완고하고 무감한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고, 그도 그랬지만, 내가 서툰 영어로 그 문장들을 천천히 늘어놓는 동안 나는 그의 마음이 천천히 내게 오는 것을 느꼈다. 내 마음이 그쪽으로 걸어가서 그의 마음을 데려오고 있었다.


좋은 사람인데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애매한 관계가 있다. 무언가가 미묘하게 어긋나는데 그 '무언가'라는 게 남에게는 하찮을지 몰라도 사실 나에게는 본질적인 부분이라 우리는 결코 한 별에 같이 있을 수 없다. 각자 다른 별에서 각자의 주기로 자전하다가, 같은 계 속에서 공전하는 관계로 잠시 마주치면 "안녕하세요"하고 서로 손을 흔드는, 그런 관계다.


스케이트 신발이 발에 맞지 않아 얼음을 지칠 때마다 발목에 피가 스미는데도, 계속 스케이트를 타고 싶은 그 마음. - 김연수


무엇이 두려울까. 어떤 과정에서도 내가 나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서울에서의 하루도 춘천에서의 하루도 똑같은 인생의 하루일 뿐인데, 하루의 모든 것이 특별해지고 남루했던 일들조차 두고두고 소중하게 기억된다는 것. 그게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일 거다.


사실 그때 그날의 두더쥐는 아마 도인의 확신에 찬 복주머니를 옆구리에 차고 싶었을 것이다. 도인의 말이 틀렸다 해도 두더쥐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확신이 중요했다. 너는 잘 될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이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두더쥐는 점쟁이를 찾는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은 어쩌면 이런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세계란, 기적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남루한 전체다. 혹은, 시끄러운 찰나들이 모인 적요한 호흡이다. 또다시. 빛나는 문장으로 채워진, 한 권의 가난한 종이책이다.


어린 시절엔 이유가 없는 쓸데없는 일들을 잔뜩 했었는데 전혀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바쁘다 인생이 짧다 혹은 길다와 같은 것들을 아직 몰랐던, 내 인생이 가장 길었던 시절.




Posted by 超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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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쥐어져있는건단지,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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