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현모양처형 이미지를 리사코에게 요구했다는 사실을 데쓰로는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는 가정을 지키면서 남편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위주로 행동하는 남자들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환상에 불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자가 이기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선수로선 아직 멀었어요. 오히려 여자가 이기면 얄밉다고 생각해야 하지요."
"당신이 챔피언이 되면 여자의 힘을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때 증명할 수 있는 건 여자가 이기면 조금 떠들썩하다는 정도 아닐까요? 여자도 남자와 똑같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역시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할 거예요. 여자가 남자한테 이기는 게 하나의 사건이 아니고, 남자가 여자에게 패해도 부끄럽지 않게 되려면 한참 멀었어요. 당구처럼 좁은 세계에서도 말이죠."
"남자들이 바뀌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여자도 바뀌어야 해요. 상대가 남자라고 해서 눈빛이 달라지면 안 되겠죠. 그런 점에서 보면 나도 아직 멀었어요. 여자니 남자니 따지기 때문에 얘기가 복잡해지는 거예요. 난 한시라도 빨리 그런 것에서 해방되고 싶어요. 물론 당구에서만 말이에요."


그럴지도 모른다. '성정체성 장애'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지금도 편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애당초 '장애'라는 말이 포함된 이상 편견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다만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 사회적 윤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회적 윤리가 반드시 인간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경우, 명확한 근거도 없는 단순한 사회 통념에 불과하지 않은가?


"매스컴을 싫어하신다고 하더군요."
"싫어하는 게 아니라 믿지 않는 거요. 그들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에 가둬두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말로 표현하지 다른 사람에게는 맡기지 않아요."


세상에는 혈액형별 성격 분류를 믿는 사람이 많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은 A, B, O, AB형의 네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혈액형에 따라 상대를 차별하는 일은 거의 없다. 혈액형이 달라도 인간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네 종류라는 대략적인 방법으로는 분류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염색체의 종류에는 왜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성염색체가 XX든 XY든, 또는 그것과 다르다고 해도 인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고방식을 왜 가질 수 없는 것일까?


"난 당신에게 묻고 싶었어. 이 세상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나를 당신의 세계에 넣어주지 않을 생각이었냐고. 남자의 세계라는 곳에 말이야. 그곳이 그렇게 대단한 장소야? 여자는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야? 남자들은 왜 여자를 그곳에 들여보내지 않으려는 거야?"


손목시계를 쳐다보자 시계바늘이 8시 1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왜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는 걸까? 그것도 나쁜 쪽으로 말이야. 인생에 성공하면 오만해지고 실패하면 비굴해지지. 난 옛날에 이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어. 부잣집 딸과 결혼해 가문에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싶진 않았다는 뜻이야. 하지만 실제론 그런 길을 선택했지. 난 자기 혐오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어. 그래서 그걸 사가 씨와 같이 트랜스젠더 문제에 대항하는 것으로 상쇄시키려고 한 거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만족이고 현실 도피에 불과했는지도 몰라. 눈앞에 있는 적만 쓰러뜨리면 되던 대학시절이 그리워."


 




Posted by 超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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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쥐어져있는건단지,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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